11월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양로원 문을 열었다
독일 유학 초기, 그때는 IMF가 터졌던 시기였습니다.
내가 공부하던 도시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유학생들이 하나둘씩 한국으로 돌아가던 때였지요.
한국에서 오던 생활비가 끊기면서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던 것이 이유였습니다.

나는요?
IMF와는 상관없이 이미 경제적으로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통장에는 겨우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생활비만 남아 있었고, 집에 말씀드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11월 중순쯤이었을 겁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위해 지역신문을 펼쳤고, 레스토랑에서 서빙 직원을 구한다는 작은 광고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번호를 누르던 내 손가락이 얼마나 떨렸는지, 지금도 또렷합니다.
미리 종이에 적어 온 말을 그대로 읽어 내려갔고,상대방의 말은 80% 이상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날짜와 시간만은 어렴풋이 이해했을 뿐입니다.
약속한 날,
내가 가진 가장 좋은 롱코트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나섰습니다. 레스토랑 근처까지 갔지만, 더 이상 페달을 밟을 힘이 없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전거를 끌고 문 앞에 섰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날 처음으로,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라는 말을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약속 시간 10분 전,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털복숭이 주인은 나를 보더니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습니다.
어렴풋이 들린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학생인지, 경험은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 질문.
“노동허가증이 있느냐”
그 말은 내 독일어 실력이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사전을 꺼내 그 단어를 써 달라고 했고, 거기에는 분명히 노동허가증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없다고 말하자 그는 손을 흔들며 나가라는 몸짓을 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는 내 뒷모습이 얼마나 초라했을지, 나는 그 자리를 빠른 걸음으로 벗어났습니다.
몸이 떨리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말이지요.
낡은 롱코트, 플리마켓에서 산 자전거를 끌고 터벅터벅 걷는데 그때 11월의 첫눈이 내렸습니다.
눈물이 주책없이 쏟아졌고, 앞이 흐려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너 참, 대책 없었겠다.”
그런데 그때, 눈앞에 푯말 하나가 보였습니다. ‘ Altenheim ’ 양로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냥 그 푯말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Weender Park Altenheim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할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두 명의 독일인이 앉아 나를 보며 “누구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요. 생활비가 필요해요.” 딱 두 문장이었습니다.
그중 한 여자가 나를 가만히 보더니 말했습니다.
“그래? 지금 점심시간인데, 식당에서 노인들 식사 도와줄래?”
나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날, 나는 양로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부가 끝날 때까지, 무려 5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말로만 듣던 ‘벽에 똥칠한다’는 장면을 실제로 보았고,
채식주의자였던 할머니가 정원에서 풀을 염소처럼 뜯어 드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치아가 없어 모든 음식을 갈아서 대접해야 하는 현실도,
씁쓸하게 마주했습니다.
빵에 초코크림이나 크림을 바르고 그 위에 살라미를 얹어 먹는 조합이 의외로 나쁘지 않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딸기잼을 발라도 괜찮다는 것도요.

5년의 시간은 슬픔과 아픔과 절망이 뒤섞인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초코크림을 듬뿍 바르고 살라미를 얹어 빵을 먹습니다.
11월 첫눈이 내리면, 그곳에서 만났던 얼굴들이 조용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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