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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살이의 일상 수집

Weenderpark 노인들 — 내가 독일에 머물 수 있었던 이유

by 만년살이의 작은 기록 202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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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꺼내는 데까지 나는 꽤 많은 시간을 망설였다.

독일에서의 시간은 이미 여러 번 글로 남기려다 매번 시작과 함께 손을 놓았던 기억이 더 많다.

아프다는 이유로 혹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늘 이 이야기를 뒤로 미뤄두었다.

 

 

독일 유학 초창기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던 시절 나는 양로원에서 일했다.

 

Weenderpark Altenheim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그런 힘든 데서 일을 하냐”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때의 나는 어딘가 물에 기름처럼 떠 있는 기분으로 새벽 어스름한 공기를 가르며 자전거 페달을 밟고 양로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면 이상하게도 나는 집에 온 것 같았다.

 

압박 스타킹이 잘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이 헤질 만큼 힘을 주어 할머니 다리를 감싸던 시간,

쭈글쭈글한 얼굴에 정성껏 크림을 발라드리며 괜히 더 천천히 손길을 옮기던 아침,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분에게 “어젯밤 왕자님 꿈 꾸셨나 봐요, 오늘 기분이 정말 좋아 보여요”라며

아무 의미 없는 말로 안아드리던 날들,

젊었을 때 참 아름다우셨을 것 같은 Anna 할머니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Du bist einmailg .“ 라고 말해주셨다. 그 손길이 지금도 또렷하다.

 

Mueller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양로원으로 돌아오셨다.

침대에 누운 채 빨대로 겨우 물을 한 모금 드시던 모습 잠깐 일어나고 싶다는 손짓에 침대 윗부분을 올려드렸을 때 복수로 불룩해진 배,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조용히 숨을 놓으셨다.

연고가 없어 화장된다는 Sozialamt 직원의 말을 듣고 나는 양로원 문을 나와 그냥 울었다.

그때 직원 한 분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처음이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양로원과 작별하던 순간마다 나는 이 말을 들었다.

 

“Er hat geschafft.”

 

그는 이 세상을 잘 견뎌냈다는 뜻이었다.

 

"Iska" 그녀는 내가 독일에 머물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다.

노동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레스토랑에서 쫓겨나듯 나왔던 11월 첫눈 오던 날

낡은 자전거를 끌고 Weenderpark 화살표를 따라 들어갔을 때
점심시간인데 식사 도와줄 수 있겠냐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사람

 

빨간 페라리에 나를 태워 “너 귀 안 뚫었구나” 하며 귀를 뚫어주던 사람

떠나는 나를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고 문을 나갔던 사람

 

그녀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내게는 일을 준 사람, 속단하지 않았던 사람
그리고
여전히 고마운 사람으로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첫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나는 Weenderpark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Iska도 내가 알던 노인들도 아무도 없었다. 그 허망함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남겨둔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그리운 사람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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