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이에서 살다 – 독일 귀국 준비
역사소설을 계속 읽는 방법에 대하여

독일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소설은, 앞으로 어떻게 읽어야 하지? 한국에 있으면 아무 고민 없이 종이책을 집어 들면 되는데 독일에 가면 그게 쉽지 않다.
서점도, 중고서점도, 헌책방도 마음처럼 가까이 있지 않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자책을 떠올리게 된다.
여러 e-book 플랫폼을 하나하나 들여다 봤다. 월 구독료를 내는 곳도 있고 책의 숫자만 보면 부족하지 않아 보이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역사소설만 놓고 보면 내가 만족할 만큼 채워져 있는 전자서점은 끝내 없었다.
특히 고전 장편 역사소설들은 더 그랬다. 이미 다 읽은 책들이기도 하고 기억력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 안에 들어가 함께 살아서인지 그 이야기들은 세심한 장면까지 거의 몸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전자책으로 다시 읽을 때면, 이미 함께 살아본 이야기들을 처음 읽는 척 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종이책으로 마음을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종이로 된 역사소설들을 미리 사서 컨테이너에 함께 보내기로 했다.
조금 번거롭고 조금 무겁고 조금 아날로그적인 선택이지만 나한테는 이게 가장 자연스럽다.
요즘은 알라딘 중고서점도 기웃거리고 동네 헌책방도 슬쩍 들여다본다.
형제들이 갖고 있는 책들 중 이미 읽었던 역사소설들을 하나둘 얻어올 생각도 하고 있다.
이미 다 읽은 책들이라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몇 번을 읽어도 책을 펼치는 동안 나는 그 시대의 민초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아픔과 잠깐의 기쁨을 같이 겪게 된다.
산길을 걸을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500년 전에도 누군가는 이 길을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주먹밥을 씹으며 걸어가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나는 늘 장편 역사소설을 선호하게 된다.
금방 끝나는 이야기는 그 시대에 정 붙이기도 전에 책장이 덮여버리니까...
얼마 전에는 김훈의 《남한산성》을 다 읽었다. 책을 덮고 나서 자연스럽게 계획 하나가 생겼다.
독일로 가기 전에 남한산성에 꼭 한 번 다녀오자는 것.
책으로만 만난 공간을 실제로 한 번 걸어보고 싶어졌다. 수묵화의 느낌을 그 곳에서 맡아보고도 싶다.
읽는 동안 나는 김상헌의 마음이 되기도 하고 최명길의 고민이 되기도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들이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이 자꾸 답답해진다.

그래서인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라는 단어가 왜 이 순간에 떠오르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내가 완전히 지금의 나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본 적도 있다.
독일에 가면 내가 책방을 열까! 그것도 새 책이 아니라 헌책방을...
독일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 책을 빌려주는 아주 작은 헌책방!
어느 큰 도시가 아니라 외진 소도시의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곳이면 좋겠다.
찾아온 사람에게는 커피나 차를 내어주고 마음 가는 자리에 그냥 앉으라고 말해주는 곳.
시간은 신경 쓰지 말고 책장을 넘기다가 종이 냄새를 맡다가 괜히 한숨도 쉬어가도 되는 곳.
실현 가능성이 0%라는 걸 나도 잘 안다.
그래도 그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진다.
아마 나는 그 헌책방에서도 책을 파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같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실현되지는 않아도, 그런 헌책방을 한 번쯤 살아본 기분으로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조금 불편한 방식으로
조금 느린 속도로
독일의 낯선 숲길 한쪽에서 오래된 종이책 한 권을 펼치고 그 시대에 잠시 다녀오는 사람으로..
그 정도면
내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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